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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람, Francisco GoyaLife/Art 2022. 9. 5. 08:49
1823년 Francisco Goya는 자신의 집 벽에 Saturn Devouring His Son을 그렸다.
그림을 사유해보면 뭔가 심리적 상황이 반영되었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런 그림을 그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프란시스코 고야(1747-1823)의 그림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태어났지만 왕립 아카데미 입학이 거부된 후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공부했다. 그는 1775년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야는 일을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는 쇠약성 질병이 발병하며 고통을 받게된다. 그러면서 죽음과 늙음과 광기를 두려워하기 시작하게 된다.
1770년대 후반 Garrotted Man은 향후 그려질 그의 그림의 시작이된다.
1780년대에 그는 귀족들로부터 초상화를 그려주는 의뢰를 받았다. 왕의 이복동생인 Don Luis와 같은 사람 그리고 1789년에 그는 권위 있고 보수가 좋은 직위인 공식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1790년대에 고야는 신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점점 신경 쇠약에 이르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의 예술은 점차 표현력은 풍부해지지만 양식화되고 어두워졌다. In Yard with Lunatics, 1794 고야는 광기를 주제로 그렸다.
그는 또한 스페인 총리 Godoy 의 의뢰를 받아 아래 그림을 그렸다. Maja Desnuda, 1795는 서양 미술 역사살 비종교적이거나 고전적인 맥락에서 분명히 최초의 완전한 여성 누드였다.
그러나 그것은 Godoy의 개인 소장을 위한 그림이었다. 1801년에 제작된 카를 4세와 그의 가족의 초상화는 왕실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스페인에 대한 그의 상반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고야는 조국에 좌절하고 있었다.
Los Caprichos중 하나인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에서와 같이 고야가 스페인 사회의 낙후된 상태로 간주했던 것을 우화로 만든 일련의 에칭이다. 그는 그의 나라를 지배하는 미신적이고 비합리성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Yard with Lunatics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고야 자신의 불안과 질병에 대한 쓰라린 유베날리안 풍자와 환상적이고 불안한 비전이 혼합되어있다.
1807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고 전쟁이 시작되자 끔직한 폭력의 물결이 일어났다. 고야는 그의 Disaster of War 에서 아리러니와 동정이 뒤섞인 이 갈등의 혼란과 공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다.
그는 특히 군인들의 손에 가해지는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았다.
영웅주의나 용맹의 이상에 대해 신랄하고 냉소적인 모습의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고야의 그림에 등장하는 얼굴들이 진정으로 매혹적이고 참혹한 찡그린 표정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것은 전쟁의 한 장면을 묘사한 1808년 5월 3일이다.(1814)
1808년에 Maja Desnuda가 그를 괴롭히기 혔다. 종교 재판에 의해 Godoy의 개인 소장품에서 압수되었고 고야는 음란한 것을 그린 것에 대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된다. 다행히 형벌은 피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종교와 미신적 스페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1810년대 후반의 그의 잠언은 완전히 악몽 같은 비전의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74세에 고야는 마드리드 외곽의 농가 Quinta del Sordo(이전 세입자의 이름을 딴 "농아인의 별장")로 이사했다.
여기에 살때 그는 자신의 사회를 증오하고 고독으로 물러난, 광기에 가까운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이자 청각 장애자였다.
그때 그는 14개의 "검은 그림" 만들었다.
그는 그들에 대해 말하거나 글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사적인 예술 작품이었고 그의 집 벽에 직접 그려진 심오한 고통과 감정의 깊은 개인적인 표현이었다.
그리고 마녀의 안식일에서 종교 재판과 마녀에 대한 박해에 대해 그의 오랜 증오가 여실히 들어난다.
고야의 늙음, 죽음, 정신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모든 어둠을 표현하며 완전히 속박이 풀렸거나 억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을 잡아먹는 토성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전에 여러번 그려젔던 그리스 신화의 친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1636년 Peter Paul Rubens의 바로크 버전은 그 자체로 끔찍하다.
그러나 고야의 토성 그림에서 우리는 심연을 응시하는 한 남자를 느껴볼 수 있다. 생생하고 불안하며 심오하고 강렬하다.
고야는 1824년 킨타 델 소르도를 떠나 보르도로 이사했고 4년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검은 그림은 50년 만에 농가 벽에서 제거되 갤러리에 배치되었고 고야의 사적인 절망이 공개된다.
마지막으로
Vicente Lopez Portana가 1826년에 그린 고야 초상화다. 마지막 노부인, 혁명적인 화가, 격동의 연대기, 깊은 고민에 빠진 남자, 사회의 세계관에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가.